목차
1. 무기력이 찾아온 이야기
2. 무기력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3. 무기력을 흘려보내는 이야기
4. 마무리하는 이야기
1. 무기력이 찾아온 이야기
작년 말에 회고글(1년 차 개발자의 2023 회고)을 작성하며 열정을 불태우며 목표를 세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번아웃이 온 거냐고 묻느냐면 그것과는 다르다. 번아웃은 보통 열심히 산 사람이 모든 열정을 소모해 버린 뒤 극도한 피로감이 찾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지금의 내 상황과는 조금 달랐다. 주변 환경이 많이 변했고, 그로 인해 어떤 목표들은 이룰 수 없거나 이룰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목표가 사라짐에 따라 나의 열정은 갈 곳을 잃었고, 그 자리에는 무기력으로 채워졌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2023 회고를 작성할 때 쯔음엔 나는 우리 조직, 우리 팀에 이제 막 기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팀 측면에서도 업무 프로세스가 안정화되었고 나 스스로도 동료들에게 의견을 제시하고 지지를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신뢰 자본이나 업무 파악 능력을 쌓았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오롯이 시작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붙은 와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조직 개편이 일어났다. 새로운 서비스, 새로운 도메인, 새로운 팀원들, 새로운 기술 스택.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변했다.
큰 고민이 생겼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적응하면 좋을까? 잃어버린 내 목표와 의지는 어떻게 하지? 상실감과 함께 무기력이 밀려들어왔다.
2. 무기력을 받아들이는 이야기
처음에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을 잘 몰랐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감정인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했다. 방치해 두고 내 삶을 살다 보면 감정이 그대로 스쳐 지나갈 거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내 상태도 여전했다.
그다음은 기분 전환을 하려고 애썼다. 몇 달 전에 회사에 해외근무를 신청했었는데, 시기적절하게도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쯤 시드니에 가서 근무하게 되었다. 일하기 싫으면 휴가를 써서 놀고, 날씨가 안 좋거나 밖에 나가기 귀찮으면 숙소 안에서 일을 했다. 규칙적으로 잠을 자고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먹으며 본능에 충실한 생활을 일주일쯤 하니 확실히 기분 전환은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았고, 이 생활을 평생 지속할 수는 없으니 임시방편일 뿐이다'라는 찜찜함이 마음 한편에 남았다.
나는 이 부정적이고 모호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분명히 가려내고자 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먹구름을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고민이 무엇인지 적고, 그 고민에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붙이며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려 애썼다.
현재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일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내가 기여했다고 느끼거나 동료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뿌듯함을 느낄 때가 제일 행복하다. 하지만 새로운 팀에서는 내가 나설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왜 내가 나설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느꼈을까? 서비스, 도메인, 기술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새롭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건 차차 적응하면 되고, 그 외에도 내가 나설 수 있는 다른 부분이 있진 않을까? 내 장점은 열정 있고, 문서를 포함한 어떤 글을 작성하거나 뭔가를 분류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팀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 장점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고, 먼저 나서서 일을 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내가 느끼는 것이 '무기력'임을 깨달았다.
3. 무기력을 흘려보내는 이야기
내 감정의 정체는 알았지만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여전히 몰랐다. 번아웃이 오면 쉬면 되고, 우울함은 즐거운 일로 밀어내면 되고,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 줄 테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서 해소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났고 나는 혼자서는 충분히 고민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시야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커피챗 약속을 잡고, 컨퍼런스 참가 신청을 했다.
지난 목요일, 소주콘(소문난 주니어 콘퍼런스)라고 불리는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발표도 재밌게 들었지만, 사실 내게 큰 도움이 된 건 네트워킹 시간이었다. 네트워킹 시간 때 만난 분들께 모두 내 고민을 털어보았다. 사람마다 질문을 조금씩 다르게 드렸지만, '만약 저 같은 상황에 처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같은 식의 질문을 드렸다. 정말 다양한 반응과 의견이 있었지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었다.
완전 새로운 팀, 새로운 서비스, 새로운 기술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내 상황을 설명하던 도중이었다. '와 제일 재밌는 시기네요!'라고 반응하신 분이 계셨다. 사실 처음엔 당황했다. 이건 부러워할만한 일인가!? 당황해서 다른 말로 어물쩍 상황을 넘겼지만 집에 가면서도 그 반응이 떠올랐고, 동시에 나랑 비슷한 연차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기술을 바꿔가며 이직을 많이 하신 분들의 이야기도 떠올리며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 좋은 결과만을 바라고 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노력을 들이는 걸 귀찮아한 걸까? 익숙한 것을 좇으면 내가 기여할 상황이 생겨날 거라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작년 회고글에서 '여태까지는 알아서 데굴데굴 들어온 기회를 잡아내는데 그쳤는데, 앞으로는 내가 먼저 나서서 기회를 찾아다니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예전보다 발전은커녕 더 후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이 적은 시기라면 오히려 나는 기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이용하면 기술적 성장이 가능할 텐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드디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머릿속 먹구름이 조금은 개기 시작했다.
4. 마무리하는 이야기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저 말을 듣고 저런 생각을 한다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내가 글로 남기고 싶었던 건 생각 정리를 통한 메타 인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다른 시야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던 경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입사 후에 작성했던 회고나 생각 정리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읽다 보니 취준생 시절에는 일하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리고 내가 전팀원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느껴졌다. 전팀원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커서 새로운 기회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즉 공부에 집중해야겠다고 결심했다.(일단 커피챗 약속은 다 다녀오고!🤣) 이 글은 그 결심을 다잡고자 그리고 여태까지의 내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 되겠다.
진짜 마지막으로 여담을 덧붙여보자면 상황이 긍정적으로 흘러도 변화는 언제든지 갑자기 찾아올 수 있고, 그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요즘 같이 눈 깜짝하면 변하는 세상에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다는 점은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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